2020.05.04 ~ 2020.05.25
이 글은 필자가 202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작성한 글로, 글의 진행이 서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실제 경험과 참고 문헌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
‘수레바퀴 아래서’, 이 소설은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유년 시절 겪었던 괴로움과 고통을 담은 소설이자, 우리와 같은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내용은 소년 한스가 아버지와 선생님, 목사님 등의 어른들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신학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겪은 일,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 한스가 천천히 ‘망가져’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다. 작가는 한스의 입장에서 어릴 적 받은 괴로움을 표현하며, 그 원인인 어른들의 강요와 교육의 방침을 비판한다. 작중 주인공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쉽게 볼 수 없던 굉장히 충격적인 결말이 이 비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나와 같이 한창 학교생활, 성적 등에 고민이 많은 학생들에게 정말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소설이다. 게다가, 나는 이 책을 읽게 되기 전까지, 개학연기로 연장된 방학 기간 동안 앞으로의 내 삶과 이상적인 교육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자, 이 책을 정말 재밌고 흥미롭게 보는 이유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헤세가 직접 겪은 적이 있는 일들이다. 소설은 헤세가 겪은 괴로움을 소개하며, 헤세는 그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내가 느꼈던 그 메시지들을 천천히 알아보려고 한다. 또한, 작가인 헤세도 주인공인 한스와 하일너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학생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나와 우리의 삶에 비교해보려고 한다.
어른들의 압박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크게 4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작품에서 독자들의 눈이자 관점이 되어주는, 소설 속 세계관의 모든 문제점에 의한 ‘피해자’로 그려지는 한스이고, 두 번째는 세계관의 모든 문제점의 원인이자 ‘가해자’인 어른들이다. 쉽게 세 번째는 그 외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주는 ‘방관자’이자 ‘표석’인 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가장 중요한 네 번째는 바로 이 세계관의 문제점에 대항하는 ‘반역자’, 플라이크와 하일너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문단에서는 두 번째, 가해자로 그려지는 어른들에 대한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작중에서 한스는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라틴어 학교 선생님들과 아버지에 의해 신학교를 준비하게 된다. 소설 앞 내용을 보면,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한스는 이 때문에 어린 시절의 여가생활과 취미생활(낚시, 토끼 키우기, 그 외 다양한 놀이 등)을 모두 빼앗기고, 거의 매일 수업과 숙제를 반복하며 생활한다. 이것은 어린 한스에게 굉장히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학교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한스에게 거의 모든 어른들은 ‘그럴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내가 과학고에 지원할 때, 그리고 지금 대입을 걱정할 때의 기분을 알기 때문에, 이것은 한스 입장에서 매우 큰 압박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작가도 이런 어른들에 대한 비판의 하나로, ‘자녀들의 좋은 성적과 출세로’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 하는, 이렇게까지 한스에게 짐을 지우는 아버지를 무려 ‘우둔한 머리를 가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만큼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친구들 중, 내가 아는 선에서 대부분의 친구들은 부모님의 압박을 받는다고 했다. 평균 90점을 넘기지 못 했던 한 친구가 부모님께 혼날까봐 울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 또한 초등학생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매일 수학 문제집을 몇 페이지씩 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많이 혼나기도 했으며, 매일 하교할 때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검사를 맡았고, 아이들 특유의 웃음은 있었지만 이것은 상당한 압박이었다. 놀랍게도 이때의 내가 겪은 일들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특히 난 영재학교인 경기과학고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이런 압박을 느끼고 있다.
결국 어른들의 단순한 생각과 기대는 아이들을 괴롭히게 된다. 작중에서 한스는 이런 압박감과 걱정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괴로워한다. 단적인 예로, 어릴 적 추억이 생각났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슬픔에, 한스가 가진 압박감에 대한 몸부림과 비명을 표현하듯이 한스가 무심코 토끼집을 도끼로 박살내는 장면도 있다. 이젠 그런 부모님의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정말 고통이라는 점은 우리들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옳은 교육인가
또한 작가는 작중에 일어나는 교육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한다. 이에 의하면, 학교의 교육은 아이들의 야생성과 개성을 죽이고, 그들이 국가에 순종적인 보통의 시민이 되도록 만들며, 교사들은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렇게 대부분은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시선’의 연장선이며, 나는 결국 이것이 전통으로 이어져 쉽게 바뀌지 않을 문화적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을 믿지 않은 하일너와 그와 친하게 지내며 성적이 떨어진 한스에 대한 신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을 한스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아예 작가가 설명으로써 직접 비판하기도 한다.
학생을 성적으로 바라보고 비교하는 것은 효율적이다. 반대로, 자신이 성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매 순간에 대해 불안을 가져온다. 내가 그랬고, 거의 모두가 그랬다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성적이 좋으면 자신감과 자부심이 붙으면서도, 성적이 떨어지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불안과 무력감만이 남는다. 이것이 과연 옳은 사회인가?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로, 이 소설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으며, 독일인인 헤세의 19세기 말의 교육에 대한 경험으로 지어졌다. 대략 20년 미만의 차이로 이와 비슷한 배경의 교육과 함께 낮은 성적에 의한 무력감과 패배감을 받은 인물이 있었는데, 그 자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다. 나치당 창당과 유대인 혐오, 민족주의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독일은 이 이유 중 하나로 교육을 꼽아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로 이런 ‘괴물을 만드는’ 교육을 전면 폐지했으며, 그 뒤로는 선행학습을 금지하고 학생의 여유를 중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국다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과거제를 통해 서당과 같은 교육을 활성화시켜 국민의 수준을 높인 것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양반들만이 이런 것을 준비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교육 열풍과 비교를 해보자면, 목적에 사회적 신분 상승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양반의 자제들과는 달리 우리들은 대입과 취업 등 거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부분이 많다. 적어도 그렇게 배우고 있다. 그만큼 부모들은 처절해지고, 아이들은 힘들어지며, 이런 모습을 우리 사회의 사교육 문화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점에서는 나는 크게 포함되지 않는다. 학원을 싫어했던 것도 있고, 부모님이 초등학교 교사이시다 보니 나에게 자기 주도 학습을 먼저 가르쳐주셨다. 그래도 학원을 다니는 몇몇 기간 동안은 다른 친구들에게서 이 점을 정말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 설명한 한스의 부담감에, 성적이 낮아짐과 동시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선생님들에게는 비난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이런 상황은 말 그대로 불타는 집에 인화성 가스를 뿌려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스는 더욱 괴로워했고, 결국에는 신경쇠약이 심해져 집으로 돌아오게 되며,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이러한 교육 열풍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는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 1~2위의 최상위권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는 극단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 세대의 친구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독일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으로 작지 않은 하나의 충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뇌되는 아이들, 그리고 반복되는 문제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뒷부분인데, 작가는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기대와 압박, 그리고 교육의 방향성이 아이의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표현한다. 한스는 이런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타인이 만들어 준 목표를 가지며,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동네 친구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른들에 의한 것임을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사고방식’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의 사고와 마음이 무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인데도 말이다.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그 사고방식에 의한)아이들의 고통과 피해도 모두 어른들의 탓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를 보았을 때, 작가는 한스와 아이들, 자신이 겪은 유년 시절의 아픔이 그런 어른들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나 또한 그런 결과주의적 사고, 성적에 대한 열망과 그에 의한 우월감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이런 사고방식에 가끔 낮아진 성적이 떠오를 때마다 자존감도 낮아져 무력감에 고생을 정말 많이 해왔다.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죄악인지는 겪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학교가 좋다는 점, 성적이 나쁘지 않다는 점을 이용해 다른 아이들과 나를 비교하고 안심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인식할 때마다 죄악이 다시 나를 감싸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부모나 어른들의 탓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도 같은 방식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대물림되는 하나의 사회적 규범이 된다. 또한, 부모의 모든 행동은 자식을 자신이 겪은 실패 혹은 고통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아이는 성장하면서 그런 문제를 가지게 될 것이지만, 스스로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으며, 그렇게 자신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그냥 둬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책은 없을까
위에서 두 문제를 알아보았다. 어른이 아이에게 주는 압박, 그리고 어른의 교육이 아이에게 주는 고통. 둘 다 결국 어른들의 탓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결국 어른들에 의해 고통 받는 아이들과 이렇게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아가는 문제이다.
나는 여기서의 4번째, 세계관의 문제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등장하는 플라이크와 하일너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나타내면, 플라이크가 ‘이상적인 어른’을, 하일너가 ‘이상적인 아이’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근거를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이들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었다.
플라이크는 작중 유일하게 한스를 걱정해주고, 하나의 인격체로써 존중하고 생각해주는 어른이다. 교사들이나 목사, 심지어는 한스의 아버지마저 신학교 준비를 위한 공부를 시키며 만족하는 중에, 플라이크만큼은 한스가 야위었다고 걱정해주고, 햇빛을 자주 쐬며 바깥 공기를 많이 쐬라는, 흔하지만 필요한 조언도 보태준다. 심지어 한스가 신학교 시험에 떨어질까 걱정하던 도중, 떨어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다른 어른들 사이에서, 정말 놀랍게도 ‘유일하게’ 한스에게 떨어질 수도 있다고, 떨어져도 괜찮다고 해준 사람이다.
특히 이런 점에서 플라이크는 같은 신앙심을 가진 ‘목사’와 크게 대조된다. 플라이크는 한스의 두통을 심히 걱정한 반면, 목사는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다며 당연하지 않은 상황을 당연하게 만들고 한스의 아픔을 무시한다.
한스는 플라이크의 충고와 걱정을 완전히 귀담아듣지는 않지만, 분명 들었을 때는 큰 도움과 축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플라이크가 작가가 묘사하는 ‘이상적인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한스가 죽게 된 이유를 그의 아버지에게 넌지시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도 괜히 플라이크가 맡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생각했을 때, 플라이크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일너이다. 하일너는 한스가 신학교에서 만난 인물 중 유일하게 학교의 교육을 비난했고,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잘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그를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뜻을 굽힐 아이는 아니었다. 그가 신학교에 와서 한 것은 그가 좋아하는 ‘작문’ 뿐이었고, 적어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열중할 줄 알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학습’은 하일너의 행동과 비슷하다. 적어도 길어진 방학동안 나는 떨어진 성적과 앞으로의 장래에 대해 매우 깊고 길고 괴로운 고민을 해보았고,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나에게는 정말 하고 싶은 꿈이 몇 가지 있다. 이 중에는 지금의 진로와도 일치하는 생명과학 연구원이 있고, 그 외에는 창업이나 달 정착 등의 방향성이 비슷한 것도 있지만, 영상이나 작곡과 같은 꿈들도 있다. 잘 하는 것을 좋아하고 못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건지, 내가 무언가를 진짜 좋아하는 것인지,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말 고민이 많지만, 적어도 그런 목표를 가진다면 나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쉽게 말해,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위해서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인생 설계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제3공화국이나 한자의 어원 등 목표와 관련 없는 과목을 낭비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입시를 만든 사람들이 이를 몰랐을 리 없고, 이런 쪽에 관해서라면 나는 정말 하고 싶은 말과 생각해보고 싶은 내용이 많다. 이렇게만 봐도 나의 논리를 확실히 하는 것마저 내 꿈이자 목표이고, 그것을 위해 나는 몇 시간씩 고민하곤 한다는 점에서 예시를 들 수 있다.
내 글을 읽고 답변을 해 준 친구 중에, 위의 의견과 정반대의 말을 해준 친구가 있었다. 사회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관점과 안목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필수 교육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헤세는 학생을 국가에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교육을 비판했다. 이 둘 사이의 정확한 선을 내가 잡아내기엔 내 지식이 너무 얕지만, 나는 이것이 깊이에 대한 중요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역사 수업에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들었고, 미술 수업도 그러했으며, 나는 동의했다. 중학생 때의 도덕과 국어는 충분한 의미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그 난이도와 깊이에 대해서는 ‘필수 상식’과 ‘전문’의 선이 있을 것 같다. 수능과 공시의 국사 난이도가 이 점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평가원에서 결정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책에서 나오는 그리스어나 산술, 히브리어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알 수 없지만, 작가의 표현을 보면 그것의 난이도는 중요도에 비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한스는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스로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면, 하일너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이 스스로 세운 목적이 있었다. 한스는 길을 잃고 지쳐 죽음에 이르렀지만, 하일너는 작가의 후일담에서도 ‘한 명의 남자가 되어’ 잘 살아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하일너가 ‘이상적인 아이’라고 생각하고, 하일너처럼 목적이 확실한 삶을 살고 싶다. 여기서 ‘이상적인 아이’의 정의를 보자면, 적어도 하일너는 이런 옳지 않은 교육을 비판했고, 비록 그 교육을 바꾸지는 못 했지만, 도망치면서도 목적의식이 확실했기 때문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헤세가 전하는 메시지
맨 앞에서 작가인 헤세는 자신의 어릴 적 삶에서 겪은 괴로움을 이 소설에 나타내었다고 했다. 헤세의 괴로움은 무엇이었을까? 헤세는 14세에 명문 개신교 신학교인 마울브론 기숙학교에 합격했으나, 바로 다음 해, 부적응과 신경쇠약 때문에, ‘시인이 되지 못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며 학교를 중퇴했다고 한다.
그 뒤에 나타난 첫사랑마저 아픔이 되어 정신적으로 무너진 것까지 ‘헤세의 삶’은 한스의 삶과 매우 비슷했다. 이렇게 보면 헤세는 자신의 괴로웠던 기억을 주인공 한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그 배경에 대해 비판하며 이런 현실을 바꾸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비판의 내용뿐이라면, 이런 현실은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걸까? 좀 더 다른 시각으로는, 헤세가 한스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물론 헤세의 삶은 단순히 한스처럼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며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인이 되지 못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헤세의 말이 한스의 입장으로 보기에는 조금 어색하지 않은가?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 속에서 ‘헤세의 삶’을 나타내는 인물은 한 명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하일너이다(하일너의 ‘이름’은 헤르만이다!).
쉽게 생각하면, 한스는 자신을 표현하는 등장인물을 두 명 넣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의 괴로움, 맹목적인 공부와 압박을 나타내는 ‘한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상, 꿈과 열정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회에 대한 비난을 나타내는 ‘하일너’이다. 어쩌면, 더 자세하게 보았을 때, 신학교에서 헤세가 지내는 동안 현실(한스)과 자신의 이상(헤일너)이 충돌하고 화합하는 모습이 이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른들과 해결책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위에서 말한 ‘어른들의 탓’처럼, 이런 일들에 대한 어른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숫자의 묶음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마치 플라이크 아저씨처럼 적어도 한 명의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한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중요한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위의 ‘어른들의 탓’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받는 고통을 내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당장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하일너와 작가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무의미한 고통에서는 도망쳐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 나아가면 되니까. 대신, 그 고통을 잊거나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같은 실수를 막는 첫걸음일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어른이 될 것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가볍게 보면 두 개가 된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들어있는 어른들을 향한 비판과, 그 속에 숨어있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향한 응원. 물론 나에게는 교육과 같은 내용이 조금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만큼 이 소설은 깊고 심오하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나는 삶과 어른, 그리고 교육에 대해서 보석과도 같은 새로운 의미와 고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의 의미에 완벽하게 다가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책은 내가 가진 고민에 완벽하게 다가왔다.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지 않게 굴러야겠지만, 수레바퀴를 없앨 수 없다면 그것을 목표로, 적어도 어디로 갈지는 알고 굴러야겠다. 나만큼은 수레바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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