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수행평가 : 논술, 명견만리: 불평등, 병리, 금융, 지역 편을 읽고]
2021.05.14
이 글은 필자가 202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작성한 글로, 글의 진행이 서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실제 경험과 참고 문헌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
외로움이 문제가 될 거라는 점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일어나 사회가 봉쇄된 2020년 2월부터, 나는 세상과 완전히 떨어져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고 방 안에만 박혀있었다. 이 때 내가 우울했던 건 딱히 외로움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기간 이후 사람을 만날 때면 내가 가진 여러 고민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비슷한 시기에 고등학교를 자퇴한 몇몇 친구들도 극심한 외로움을 호소했다. 목적에 따라 어디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평소에도 말 할 사람이 없는 경우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그 친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례를 생생하게 들으며 깨달았다. 나도 20대가 되고 대학을 떠나 직장생활을 시작하려 하면, 이와 비슷하게 말할 사람도 없이 외롭게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때 딱 유튜브를 볼 때마다, 동네 친구 찾기 앱과 같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입의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이 사회의 사람들이 점점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많이 안고 살기 시작했고, 이것이 앞으로 사회적 문제가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 책을 보니 그 정도는 이미 상당했다. 단적인 예시로 정부에 외로움 장관이라는 자리를 새로이 설치한 영국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직장이나 가정 등의 활동에 의해 친밀도의 입장에서 고립되는 사람들이 주위에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고, 내가 예상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 외로움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닌, 도시화가 일어나는 많은 국가들이 공유하는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는 중에 놀랐던 것은 많은 친구들이 외로움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선생님 말씀대로 친구들이 아직 그런 상황을 눈으로 목격하지 않아서, 그들이 가족과 아직 친밀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반대로 가족들을 멀리하면서 이런 느낌을 배운 것도 있지만, 거시적인 진화심리학 관점에서도 외로움이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우리와 같은 사회적인(집단을 이뤄야만 상대적 적응도가 올라가는) 동물에 대해서는 집단에 소속되어있지 않음에 대해 고통을 받지 않는 유전자는 이미 빠르게 멸종했고, 따라서 남아있는 개체군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이것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맞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국민의 큰 부분이 해당 문제로 고통을 앓고 있다면 이는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 이미 국가들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민국가들의 특성 상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들에게 삶의 질 하락 및 우울증 등의 많은 피해를 안겨주고, 이 피해는 사회적으로도 이어지는 만큼 사회와 국가에게는 외로움이라는 존재가 매우 위험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 문제라는 점에 동의했고, 내 기억 상 거의 나만 동의하는 분위기로 토론이 흘러갔었다.
일단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외로움의 원인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의 결여인가? 한참을 토의한 결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외로움을 확실히 덜 체감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는 다른 나라의 많은 정책들은 확실히 큰 효과를 보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황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자면, 듣는 사람은 자신이 해당 이야기를 듣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일부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는데,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손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으며, 이 사람은 고립되곤 한다. 어쩌면 이야기에 대한 ‘경청’에 대한 초등교육 등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은 확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어떨까? 나는 내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괴로움이 하나 있었으며, 그것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느낀 탓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의 최대 암흑기를 그런 생각을 크게 가지고 살았던 2018년부터 2020년까지로 잡고 있다.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아니면 가족의 반응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인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 마음이 놓아지지 않는다. 외부인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들보다는 불편하다. 반대로 친구들이라고 해봐야, 내가 내 이야기를 모두 전해주는 친구도 따로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려는 사람도 주위에 몇몇 있었고, 나는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 입장이었다. 거절도 못 하니까 듣는 것에 대해 피해를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보면 확실하게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맞다.
나에 대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모든 인정이 사라지고, 내가 가지고 있던 목표들이나 삶의 의미들도 다 부서졌다고 느끼면서, 마침내 내가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낀 적이 있었다. 표현의 차이가 크겠지만, 적어도 나는 직관적으로는 그렇게 느꼈다. 적어도 무언가는 나에게 남아있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아마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때가 내가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면서, 일기를 포함하여 많은 글을 쓴 시기였다.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말하기에는 그냥 우울하게 있는 것이 마음 편했던 것 같다. 그 때 계속 생각했던 것은, 앞으로 이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이 때 생각했던 것은 외로움뿐만 아니라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에 대한 것을 포함하지만, 우선 나를 ‘보는’,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나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때부터의 일기는 나 자신에게 보내는 보고서였다. 특히 현실 도피와 같은 문제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아비판적인 내용이 많았고, 해당 과정을 통해 성장하다 보면 나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 빠르지만 쉽지 않은 공회전으로 많은 도전을 하고 조금씩은 성장을 했으며, 나보다 먼저 다른 친구들이 인정을 해주기 시작했다. 물론 나를 고립시킨 것은 나 자신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말할 상대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는 사람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단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그냥 말하는 것은 듣는 그들 입장에서는 때에 따라 피해가 될 수 있으며, 내 행동이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이런 입장에서, 친구들이 들어도 피해가 되지 않는 말이라면 때에 맞는 유머 정도밖에 없었고, 내 캐릭터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사실 내가 일기를, 글을 쓴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다. 말로 꺼내지는 못 하더라도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 과거의 나에게 있었던 일 등은 남기고자 했고, 그것이 지금 책 2~3권 분량의 일기가 되었다. 공감이든 인정이든 그런 시각을 받고 싶은 그런 생각을 잠재울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느낌은 확실히 더 나아졌다. 내가 외로움을 가진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앞으로는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이 되었다. 당장 생각을 공유하며 먼 미래를 약속한 친구들 그룹이 있고, 나도 그 그룹에서 아쉽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 가까이에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는 그리 많지 않겠지. 낯을 많이 가리면서 그것을 숨기는 내 특성상 지금 학교만큼 다른 곳에서 발을 넓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비슷하게 쭉 이어진다면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정도인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나를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보면 앞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학교보다는 훨씬 줄어든다는 점이 큰 변화가 될 것이다. 학교에서 친해진 사람들이 평생 갈 것이 아니라면, 다른 기회를 사회가 준비해주는 것은 가능할까? 책에서 나온 Men’s Shed 아니면 주거 공간, 동아리 활동과 같은 경우가 이런 예시가 될 것이고, 이를 보편화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을 것이다. 보편화하면서 피해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인공지능 챗봇이 살짝 떠오르지만, 만약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인공지능 챗봇을 보급한다거나 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건 좀 소름이 끼칠 것 같다.
만나는 것 자체도, 나가는 것부터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다. 또한 앞으로도 언택트 사회의 형태는 남아있을 것이고, 신규 전염병 등의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경우 사람들 간에 만나는 것이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떠오르는 아이디어 하나는, 인터넷 공간이 요즘 굉장히 크게 발달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만남도 가상공간을 이용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아바타와 표정 연동 등을 잘 이용하면 엄청난 접근성으로 쉽게 만날 수 있고, 만남을 쉽게 함으로써 적지 않은 양의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통화나 채팅만으로는 우리는 완전한 대화를 진행하지 못하는 만큼, 더 고차원적인 장거리 통신이 필요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사실 나는 가장 먼저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이런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인터넷 속도는 얼마나 필요한지, 관련 업계는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등등을 알아보기도 했었다.
사회적 외로움에 대해서는 한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문제가 엄청난 영향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실제로 내가 경험해보고 주위에서 느껴본 만큼 그 중요성을 체감하고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 하나, 내 주위 몇몇 친구들끼리 만큼은 문제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은 각각의 개인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나라면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책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인간을 치유적 존재로 생각하여, 그런 방법이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가까운 사람들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의미 있는 영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새로운 온라인 플랫폼을 만든다던가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환경만으로는 개인적인 부분을 만족시키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의무교육에서부터 1대1 상담 등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굳게 믿고 있지만, 항상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들은 법안 발의나 투표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도 나를 시작으로,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게 된다면 사회의 큰 시선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쪽의 방법이라면 노력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은 정말 몇 년째 하고 있지만, 명쾌한 답을 낸 적은 당연히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외로움이라는 것은 내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감정들로 나타나는데, 나는 왜인지 그 감정을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도 작년에 낸 결론과 같이, 일단 내가 나아가고자 한다면 같은 문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며, 이에 따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막상 생각을 모두 적어내보아도, 쉽지 않은 주제라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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